한국은행 “CBDC 신중론”… 예금토큰 실사용 검증하며 하이브리드 모델에 무게
PIP·e-HKD·Partior 사례 확인… 한국도 글로벌 결제망 연계 전략 필요

28일 서울 양재 aT센터에서 열린 『코리아 핀테크 위크 2025』에서 열린 ‘핀테크 시대의 새로운 금융인프라: 디지털화폐의 현재와 미래’ 세션에서 한국은행과 일본 Progmat, 국내 금융·블록체인 업계가 참여해 CBDC·스테이블코인·예금토큰 등 디지털화폐 구조 전반을 논의했다.
한국은행은 CBDC의 성급한 도입보다는 법적·제도적 검토와 금융안정 리스크 분석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일본 측은 국가별 생태계가 글로벌 시스템과 연결되지 않을 경우 확장성이 제한된다며 장기적 규제 설계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이어진 패널 토론에서는 준비자산·국경간 전송·발행주체 등 국내 법제화의 현실적 쟁점이 논의됐다.
첫 발표자로 나선 한국은행 김동석 디지털화폐기획팀장은 전 세계 중앙은행의 90% 이상이 CBDC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공식 도입 국가는 극히 제한적이며 대부분이 실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과 유럽중앙은행도 범용 CBDC 상용화는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CBDC 연구 자체를 중단한 상황이다. 김 팀장은 “CBDC는 기술적 구현보다 금융 시스템 전체에 미치는 구조적 영향이 훨씬 크다”고 말하며, 한국은행법상 발행 근거, 민간 예금 축소, 금융위기 시 뱅크런 가속 등 근본적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은행은 토큰 기반 디지털화폐의 혁신 가능성은 높게 평가했다. 블록체인 기반 지급결제가 도입되면 스마트계약을 활용한 자동 대금지급, 실시간 정산 등 새로운 형태의 결제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실제로 미국과 홍콩에서는 GPS·스마트계약을 활용한 운송비 자동 정산, e-HKD 기반 전자상거래 자동결제 등 파일럿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김 팀장은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금융 인프라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라며 한국형 디지털화폐 인프라의 세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CBDC 단독 모델 ▲민간 스테이블코인 중심 모델 ▲기관용 디지털화폐와 은행 예금토큰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모델 중 마지막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밝혔다.
한국은행이 올해 진행한 ‘프로젝트 한강’ 1차 실거래 실험에서는 주요 은행과 편의점·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예금토큰 기반 실거래가 검증됐다. 토큰과 예금 간 양방향 변환, 실거래 처리 속도, 오류율 등에서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은행은 후속 실험에서 스테이블코인 연계 모델도 검토할 계획이다.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선 일본 Progmat(일본의 ‘토큰화 금융 인프라’ 핵심 기업)의 타케자와 유스케 CSO는 스테이블코인 생태계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규제·거버넌스·글로벌 연계성을 꼽았다. 그는 “국내 생태계만으로는 확장할 수 없다”며 국가 간 상호운용성을 염두에 둔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스테이블코인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단기 이익 중심이 아닌 장기적 사회 가치 기반의 기업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진 패널 토론에서는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의 핵심 쟁점이 논의됐다. 업계는 스테이블코인 준비자산 요건으로 단기 국채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한국은 단기물 발행이 적어 준비자산 구성이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장기 국채 중심 구성은 금리 변동 시 디페깅 위험이 커져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나왔다. 또한 스테이블코인이 장외에서 외환 대체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패널들은 외국환거래법상 스테이블코인이 지급수단으로 분류되지 않는 법적 공백과, 현재 명동 등지에서 발생하는 장외 스테이블코인 환전 사례를 언급하며 “제도권 내 편입을 통한 관리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발행 주체와 관련해서는 은행 중심 모델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민간 기업의 발행을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금융안정 측면에서 발행 요건·자본 요건·준비자산 관리 기준을 엄격히 설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일본의 PIP 프로젝트(Project Instant Payment, 국가 단위의 차세대 결제 인프라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 , 홍콩의 e-HKD(리테일 CBDC 실험 플랫폼), 싱가포르 MAS의 Partior(블록체인 기반 국제송금망) 등 글로벌 사례가 언급되며 한국도 국제 결제·무역 시스템과의 연계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세션은 한국 디지털화폐 정책이 단일 모델이 아닌 다층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키는 자리였다. 한국은행은 CBDC의 안정적 도입 가능성을 장기 과제로 남겨두면서, 단기적으로는 예금토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지급결제 인프라 구축을 진행할 방침이다. 민간 스테이블코인은 준비자산·외환 규제와 연계한 제도권 편입이 필요하며, CBDC·예금토큰·스테이블코인이 공존하는 구조가 한국 금융 인프라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됐다.

